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벤저민 디즈레일리 (문단 편집) === 2기 내각 (1874~1880) ===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제국주의|팽창 또 팽창]]!"''' 야당 지도자 시절 글래드스턴 내각의 비 제국주의 정책을 호되게 비난했던 디즈레일리는 영국의 지위를 유럽 내에서 드높이기 위해 골몰했다. 애초에 본인이 대외정책을 수상직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분야로 생각하기도 했고..[* 다만 사학자들은 그가 수상직에 오를 때까지 해외로 나가본 게 단 두 번(어린 시절 중동 여행과 파리로의 신혼 여행)이었던 점 등을 근거로, 그가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유행에 편승'''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주요 외교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수에즈 운하]] 매입''' 기존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쭉 한 바퀴 돌아서 [[식민지]] 인도로 가야했던 영국 입장에서 경로 중 2,000km를 단축하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1869년)은 엄청난 선물이었다. 1875년에 수에즈 운하를 쓰는 선적들의 국적 중 80% 가량이 영국 선적이었던 게 이를 방증한다. 그 외에도 [[세포이 항쟁]] 등의 인도 내에서의 반란 및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의 격화와 맞물렸고, 이 수에즈 운하회사의 주체가 영국의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였기에, 수에즈에 대한 영국의 관심과 걱정은 해가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그런 와중 1875년 11월, 이집트의 재정악화로 당시 카디브였던 [[이스마일 파샤]]가 왕실보유의 수에즈 운하회사 주식 17만 6,602주(총 주식의 3/5)를 매도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디즈레일리는 이 사항에 대해 바로 착수했지만, 카디브 측이 400만 파운드'''(1억 프랑)'''이란 거금을 제시해 난관을 겪는다. 이에 디즈레일리는 영국 은행 대신 자신의 연줄이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을 이용하여[* 이 때 양측이 나눴다는 대화가 야사로 유명하다. 약 400만 파운드를 빌려달라는 디즈레일리의 요청을 받고, 로스차일드 측에서는 그럼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디즈레일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담보는 대영제국이다."] 거금 문제를 해결, 프랑스도 모르는 사이에 카이로에서 거래를 성사해 '''수에즈 운하의 운영권을 갖게 됐다.'''[* 수에즈 운하 지분을 사들이는 안건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뒤,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합의가 됐습니다! 당신 손에 들어왔다구요, 부인!(it is settled; you have it, madam!)"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왕을 You라고 불러서 무엄한 것 같아 보이지만 최초에만 Your Majesty로 부르고 그 이후에는 말 끝에 sir 또는 madam을 붙이면 되기 때문에 이는 어법에 맞는 발언이다.] 이후 [[글래드스턴]] 내각 시기인 1882년, 이집트에서 [[아라비 파샤]] 주도의 반제국주의 운동이 거세지자 이를 빌미로 영국군을 파견,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 '''영국령 [[인도 제국]] 성립''' 세포이의 항쟁을 진압하고 20여년이 지난, 디즈레일리 2기 내각이었던 1876년, 넓은 식민지를 가지고도 황제 칭호를 얻지 못 하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원에서 왕실 칭호법(Royal Titles Act)을 통과,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와 미얀마 등을 엮어 탄생한 영국령 인도 제국(1877)의 '''여제''' 칭호를 영국 여왕에 겸임시켜, 진정한 의미의 '''대영제국'''을 구가했다. 이 인도 제국이 영국으로부터 해방되는 1947년을 대영제국의 사실상 해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정도로 그 의미는 컸다. (자세한 내용은 [[인도 제국]] 항목 참조.) 다만, 이와 별개로 인기없는 법을 통과시킨 디즈레일리의 당시 하원 내 권위는 떨어졌다고 평가받는다. * '''[[베를린 회의]]와 [[키프로스]] 획득''' 187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가혹하게 이 반란을 진압하고, 잔혹한 현지의 상황이 영국에 전해졌을 때 디즈레일리는 이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문제는 정적 글래드스턴[* 당시에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언론인으로 생활 중이었다.]이 [[불가리아]]의 독립을 촉구하는 팜플렛을 썼는데, 이것이 영국의 여론에 불을 붙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여론에 떠밀린 결국 디즈레일리 내각은 중재단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한다. 이 와중에도 디즈레일리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자 오스만 제국 내의 군사적 요충지에 영국군을 파견해보고자 애를 썼는데, 디즈레일리를 빼고는 의회와 내각 구성원들마저 다들 오스만 제국을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분할하는 것에 목을 맸다. '''그런데 이 때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터진다.''' 1878년, 이 전쟁은 20여년 전 [[크림 전쟁]]과는 반대로 러시아의 압승으로 끝났고,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된다. 러시아와 그 [[위성국가]]들의 영토가 대폭 넓어진 이 조약은 영국 입장으로서는 위협적인 상황이었고,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회담을 제의했고, 열강들의 마라톤 협상 끝에 베를린 조약을 체결, 그 결과로 영국은 터키 아래 있는 '''[[키프로스]]섬을 손에 넣어(실효지배), 동방의 오스만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에 성공한다.''' 사족으로 디즈레일리는 이 회담에서 당시 외교관들의 공용어인 [[프랑스어]] 대신에 철저히 [[영어]]로만 말을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도 디즈레일리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저 나이든 [[유대인]], 저 사람이야말로 진짜 남자지!(Der alte Jude, das ist der Mann)"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회담을 마치고서 돌아오고서 다우닝가 앞에서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솔즈베리 경]]과 내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명예로운 평화를 바랍니다. 라는 연설을 했는데 나중의 2번째의 영국 총리가 독일로부터 가져온 명예로운 평화는 [[뮌헨 협정]]이었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사건 외에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줄루|줄루랜드]] 침공[* 다만 79년 초반의 이산들와나 전투에선 되레 줄루족에게 영국군이 패배했다. ~~대영제국의 흑역사~~ 하지만, 후술하는 대로 영국군이 삽질하여 자업자득으로 참패했던 것이 컸다.] 등, 디즈레일리의 팽창적 대외 정책은 임기 내내 계속됐다. 그러나 줄루전쟁 자체는 디즈레일리의 책임은 아니다. 당시 디즈레일리의 관심은 러시아 견제였기 때문에 줄루족과의 전쟁은 쓸데없는 힘의 낭비라고 보았다. 그러나 야심이 있었던 현지 지휘관들이 본국의 훈령을 씹고 전쟁을 시작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